올해로 헌정사상 최초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의의 독재권력에 항거한 4․19혁명이 55주년을 맞았다.

4․19혁명은 1960년대 정치적으로 광범위하게 억압받아야했던 암울한 시대에 일어난 시민들의 자유를 향한 열망이 폭발한 역사적 사건이면서 비극적이 사건이다. 당시 4․19혁명이 일어난 원인으로는 자유당의 횡포, 사사오입, 보안법 개정안의 통과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특히 이승만대통령의 부정선거 획책이 민심을 폭발시킨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에 앞서 그 당시의 경제적 상황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4․19이전의 한국경제는 그야말로 정치권력과 결탁한 매판자본가들의 시대였고 이들이 국민 대중보다 현저히 잘 사는데서 오는 상대적 빈곤의식이 극심해져 학생과 민중들로 하여금 독재, 부정부패 등 정치적 모순과 소득 불평등, 신분의 제약 등 사회경제적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저항의식이 한참 싹트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의 데모로 혁명은 시작되었고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 하기까지의 장장 2개월에 걸친 처참한 비극은 시작된 것이다.

시위의 정점이 되었던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우는 4월 19일, 국회의사당에 모인 학생 시위대열은 경무대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고 부정선거 규탄과 학원의 자유를 요구했던 시위가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혁명의 대열로 바뀌고 있었다. 시위대의 숫자는 10만명이 넘고있었고 경무대로 향하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과의 공방은 치열해졌다. 결국 경찰의 무차별적인 실탄 사격으로 인하여 피어보지도 못한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과 무고한 시민들이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리며 쓰러져갔던 것이다. 시위 이후 국민들의 요구는 이승만의 하야로 이어지고 수습이 불가능함을 알아차린 이승만 대통령은 마침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허정 내각수반이 과도정부를 이끌었고, 학생들은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는데 힘썼다. 그리하여 1960년 8월 의원내각제의 장면내각이 새롭게 출범하게 된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4월의 혁명은 민중이 범국민적인 결의를 다지면 어떠한 혹독한 탄압, 학살, 처형도 물리치고 궁극적인 승리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4.19이후의 사회운동에 정신적 활력을 끊임없이 제공함으로써 사회모순 해결에 정신적 구심이 되기도 하였다.

이제는 시위도중에 무고한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희생당하는 일은 없지만 4․19가 56주년을 맞이한 이 시점에서 그동안 자유와 정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불태웠던 그분들의 희생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1995년 4․19묘지를 국립묘지로 만드는 준공식에서 대통령이 “시민들이 즐겨 찾는 이곳이 독재와 불의에 항거하는 민주주의 정신을 배우는 산 교육장이 될 수 있도록 정성껏 가꾸어 주기 바란다” 라고 연설을 하였듯이 우리 모두는 다시 한번 4월의 항쟁에서 목숨을 바치면서 민주주의를 외친 넋들을 생각하며 그 날의 의미를 가슴 깊이 되새겨 보아야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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